시 (Poetry, 2010)
시가 죽어버린 시대, 다시 시를 쓰다


주인공 '미자 (윤정희)'는 경기도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남긴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가정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많은 나이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거동이 불편한 회장님 (김희라)의 수발을 드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고 있는 평범한 할머니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직도 소녀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고 추구하고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이런 미자에게 어느 날 얘기치 않은 세속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면서, 영화는 오히려 사건 그 자체보다는 미자에게 더욱 주목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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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창동의 '시'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응당 있어야 할 가치들이 사라져버린, 죽음과도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이다(그래서 이름도 '미자 (美子)'가 아니던가). 미자는 '시'라는 매개체를 만나게 되면서 오히려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극중 미자는 강좌 중에 그리고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시인과 그들에게 이렇게 자주 질문하다.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되요?' 시인의 대답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대답 속에도 있듯 시라는 것, 시를 쓴다는 것 자체는 무어라 정답지을 수 없을 터. 무언가 그 안에서 답을 찾고 싶었던 미자는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생각날 때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서 시상을 얻어 자신 만의 시를 한 줄 한 줄 써내려가려 하지만, 어느 한 줄 쉽게 나오는 것이 없다. 그래서 미자는 계속 물어본다. '시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되나요?'

이런 미자에게 며칠 전 다리에서 강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중생의 죽음이, 자신의 손자의 성폭행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현실을 풀어놓는다. 사실 미자는 이 상황을 그리고 이 상황을 대처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피해자들의 부모들은 완벽한 악당이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서 '서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이 이야기를 조용히 마무리하려 한다. 가해자의 부모들 뿐 아니라 학교 측, 언론,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합의금을 받을 수 밖에는 없었던 피해자의 부모까지. 이들에게 미자가 알고 있었던 도덕적인 가치는 거세되고 없다. 하지만 미자는 투사가 아니라 그저 힘없는 노인일 뿐이다. 합의금 500만원을 만들기 어려워 그나마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 같은 같은 가해자 아버지 (안내상)에게 도움을 요청해 보지만, 쉽게 들어줄리 없다.

그런데 이창동의 '시'는 이런 도덕이 거세된 세계를 현실로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모습을 더 극적으로, 악한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안내상이 연기한 가해자의 부모 같은 경우만 봐도 사람이 나빠보이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극중 미자가 처음 본 그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될 정도로 사람 좋은 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묘사 방식이 오히려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자와 상반되어 더 큰 쓰라림을 준다. 도덕적인 헤이가 너무 당연해진 세상. 그러니까 꼭 악당이라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도덕적 헤이가 익숙해진 세상이라 가해자도 피해자도 이런 순리 아닌 순리에 익숙해져 버린 세상을 그림으로서, 어쩌면 너무 멀리 와버린 건 아닐까 하는 돌이킬 수 없을 듯한 쓰라림과 회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주인공의 정의의 투사가 되어 이런 세상을 계몽하려 드는 것보다, 이렇게 자신도 힘없이 휩쓸릴 수 밖에는 없는 현실이 더 무섭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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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는 결국 오백만원의 합의금을 만들기 위해 본인의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야 만다. 그런데 회장님 (김희라)에게 돈을 받기 위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백만원을 달라는 말을 굳이 노트에 적어서 보여준 이유는 단순히 주변에 가족들이 있어서, 이들의 귀를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등장하는 노트의 클로즈업 장면을 통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감독은 오백만원만 달라는 이 메시지를 이전 미자가 어렵게 작성했던 시 한줄을 보여주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며 시를 쓸 때는 그렇게 한 줄 한 줄이 어렵던 것이,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세속적인 활동에 있어서는 너무도 쉽게 써지는 모습을 볼 때, 또 한 번 쓰라림을 겪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지극히 정상적인) 미자는 스스로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사건이 잘 마무리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있을 용기도 없고, 시를 좋아한답시고 모였지만 사실은 미자처럼 시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가벼운 마음, 또 하나의 유흥으로 여기고 모인 이들 사이에서도 더 외로움을 느낀다. 도덕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세속에 적당히 물들어야만 '좋은게 좋은' 이 세상을 미자는 견딜 용기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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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자는 처음이자 마지막 시를 쓴다. 시를 쓰고자 마음 먹은 이후부터 계속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울림을 찾으려 했던 미자의 마지막 시는 결국, 자신의 손자로 인해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여중생에 대한 미안함을 담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곧 그 여중생의 시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영화 속 미자가 알츠하이머 병에 걸려서 기억을 잃게 되는 것 또한 쓰라린 일이다. 이미 물들어버린 세상과 더불어, '아름다움' 그 자체가 스스로를 점점 더 잃어가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난다.


1. 글을 쓰면서도 계속 울컥하네요.
2. 사실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예전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밀양'은 좋아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시'가 제일 좋았어요. 진정 그는 작가네요.



글 / 아쉬타카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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