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바비차 (Grbavica, 2005)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한 마을 그르바비차,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는 12살 난 딸 사라(루나 미조빅)와 함께 살고 있다. 사라는 아버지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사한 전쟁영웅으로 굳게 믿고 있다. 에스마는 하나뿐인 딸에게 먹이기 위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농어를 사고, 수학여행 경비 200유로를 마련해주기 위해 주변 여기저기에 손을 내민다. 시내 한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고되게 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오직 사라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는 전사자 가족의 경우 수학여행 경비가 면제된다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전사 증명서를 떼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스마는 증명서 발급을 차일피일 미룬다. 화가 난 사라는 엄마에게 대들고, 이윽고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줄거리 출처 - 씨네21)

(스포일러있음)
줄거리는 대략 저러하다. 이 영화는 어쩌면 굉장히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 편으론 굉장히 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느껴졌다.
보스니아 내전. 그리고 사라예보.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참혹했고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이야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내전에 관한 좀 더 정확한 지식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저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이 영화를 100% 느끼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겪은 이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그리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세계정세에 있어서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이야기는 그들이 전세계를 상대로 끊임없이 반복해내고
인식시키려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인식시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알고 있고 지속적인 관심을 갖곤
하지만, 더 참혹한 사건들 가운데도 어쩌면 제 3세계에 속하는 세계정세에서 발언권이 많지 않는 나라들의
이야기는 이야기되어질 기회도 적고, 관심도 적은 편이다.
그래서 일단 이 영화 <그르바비차>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에게 이제 거의 잊혀질 뻔했던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 즉 무의식 중에 다 끝난 이야기라고
사고가 정리되었었던 이 사건에 대해, 그들은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고 아주 조용히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은 의미가 있는 수상이며, 특히 가장 최근의 인권유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점에서 또 특별한 의미를 갖을 수 있겠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현재를 살고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바로 어머니와 딸. 이 영화의 홍보 문구에 보면 '늦었지만.....사랑해, 엄마'라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 문구만 보면 단순히 버릇없는 딸이 나중에야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 정도로 알 수 있지만,
사실 이 영화에는 이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엄마 '에스마'는 내전을 직접 겪은 세대로서 현재를 살고 있고, 딸 '사라'는 그 엄마의 딸로서 현재를 살고 있다.
딸 사라의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아버지가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증명서가
있으면 돈을 내지 않고도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 에스마는 항상 아버지가 전사했다고 말을 해왔기 때문에
사라는 엄마에게 증명서를 때달라고 한다. 하지만 에스마는 계속 다른 일들로 이 일을 미루는 한 편,
자신이 하기 싫고 불편한 일임에도 굳이 늦게까지 일을하며, 또 친한 친구의 동료들에게까지 돈을 꿔가며
돈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보스니아의 학교내에서는 대부분 아버지들이 없는 아이들이 많은 가운데,
아버지가 내전중에 전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종의 따돌림과 무시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라는 왜 증명서를 가져오지 않았냐며 엄마에게 화를 내고, 이 와중에 참다못한 에스마는
아버지는 전사하지도 않았고, 사라는 내전 중에 강간을 당해 생겨버린 아이라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
그 동안 자신의 아버지는 내전 중에 전사한 국가유공자라고 생각해왔던 사라에게 이 보다 더 큰 충격적인
사실은 없었으리라.

이 두 여성의 이야기를 보면, 현재에도 보스니아, 사라예보에는 이 내전의 아픔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도 진행중이며, 이러한 끔찍한 참상은 단순히 기억에서 잊혀짐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아직도 피부로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 같은 피해를 입은
여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에서는 '에스마'의 이야기를 미처 알지 못해 적극 공감할 수 없었지만
영화의 말미에 에스마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할 때에는 이들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르바비차>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그들 스스로 만든 영화라는 점이다.
보통 이런 전쟁과 관련된 영화들을 보면, 그 당사자라기 보다는 영화적인 소재로 흥미를 느낀 타국의
감독이나 제작자가 만든 영화가 많다. 이런 접근방식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당사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제 3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는 없다.
아마도 이 영화를 제 3자가 만들었다면, 보스니아 내전의 참혹한 참상을 적어도 몇 장면을 넣었을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거칠게 강간을 당하고, 폭력을 당하는 모습들을, 영화적인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래야 관객들이 마지막에 가서 더욱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만든 <그르바비차>는 전혀 달랐다. 이런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결국 그런 모든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는 없는 현재의 자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에 그런 장면들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마지막 에스마의 고백이 이어진 뒤, 사라가 수학여행 버스를
타고 멀어져갈 때 더 큰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외치지 않아도 아직도 상처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는 없는 사라예보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큰 외침으로 들려주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사라는 수학여행 버스 속에서 친구들과 '사라예보, 내 사랑'을 부른다.
이 노래가 흐르는 이 장면에, 이 영화의 주된 정서가 담겨있다.
사라예보에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은 희망을 꿈꾸지만, 과거를 잊을 수는 없으며
아픔을 안고 깊게 새기며 자신들만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글 / ashitaka (www.realfolkblu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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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ephan.tistoty.com BlogIcon 스테판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들의 상처가 희망으로 지워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2008.01.11 18:27
    • Favicon of http://www.realfolkblues.co.kr BlogIcon 아쉬타카  수정/삭제

      이 영화 왠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슬퍼지는거 같아요. 한 번 더 보고 싶네요.

      2008.01.11 18:32
  2. Favicon of http://http://differenttastes.tistory.com/ BlogIcon 신어지  수정/삭제  댓글쓰기

    외부에서 대신 만들어준 영화도 아니다보니 진정성이라는 표현조차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때로는 형편없는 만듬새를 변명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하는 단어가 영화의 진정성인데 <그르바비차>는
    세련된 기법 같은 건 없었지만 별로 흠잡을 만한 구석도 없었어요.

    늦게나마 마이클 윈터바텀의 <웰컴 투 사라예보>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08.01.12 00:04
    • Favicon of http://www.realfolkblues.co.kr BlogIcon 아쉬타카  수정/삭제

      그 표현이 딱 맞는것 같네요
      '진정성이라는 표현이 불필요하다는 말'

      세련된 기법없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던 영화.
      저도 마이클 윈터바텀의 작품 꼭 기회가 되면 보고 싶네요~

      2008.01.1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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